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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 김순녀 | 작성일 | 2018-1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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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감정의 변화를 통한 영혼치유법 | 조회수 | 2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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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변화를 통한 영혼치유법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이란 단어는 성경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사전의 해석을 보면, 육체가 아니면서 육체에 깃들어 인간의 활동을 지배하고 인간이 죽으면 육체를 떠나 존재하는 정신의 실체라고 기록되었다. 다른 용어로는 영가(靈駕), 혼령(魂靈), 영신(靈神), 심령(心靈) 이라 말하고 줄임말은 영(靈)이다.
이 영혼에 대한 역사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 처음은 창세기35장18절에 나타난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魂)이 떠나려 할 때에”라면서 혼으로 명시되어있다. 그 후 시편23편3절 · 42편1, 2, 5, 6, 11절에 기록이 나와 있고 잠언6장32절 · 19장8절 · 22장25절과 미가(BC739~687년에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정)6장7절에 그리고 에스겔(BC622~571)18장4절에 나온다. 아울러 성경 외에서 영혼을 언급한 사람은 그리스의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BC500~428)다. 그는 “마음과 영혼이 뇌에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신경은 뇌로부터 기인된다.”라 주장하였고 로마시대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106~43)는 “철학이란 영혼의 치료학이다”라고 하였다. 역사에서 예수탄생을 기점으로 예수이전의 역사를 구약이라 부르고, 예수탄생이후의 역사를 신약시대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신약시대로 와서 마태복음10장28절 · 히브리서10장39절 · 베드로전서2장11절 · 베드로후서2장8절 · 요한3서1장2절 · 계시록6장9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 후 뉴턴(Sir Isaac Newton, 1642~1727)은 그의 책 <프린키피아>에서 영혼에 대하여 자세히 해석을 해놓았데, 영혼이란 “식물이 성장하고 동물들은 자각하면서 스스로 움직여 나가는 모든 원리”라고 하였다. 또 독일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는 “인간영혼의 모든 활동은 검증 가능한 보통의 물리적 가설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라고 하였으며, 프랑스의 소설가 프르스트(Marcel Proust, 1871~1922)는 그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권에서 “사랑이 사라지면 영혼도 없어진다.”라는 정의를 내렸다. 따라서 “생각이란 곧장 말로 조립되며 마음속에 들어있던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언어들을 번역할 수 있는데, 이것이 문학이다”라고 하였으므로 현대에는 문학가 · 생리학자 · 의학자 · 철학자들의 여러 가지 탐구로 영혼을 감정이라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런 연유에서 타라 베넷 골먼(Tara Bennett-goleman)이 쓴 <감정의 연금술>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
타라 베넷은 <감정의 연금술>에서 인간의 행복을 막고 있는 감정습관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녀는 심리치료사 겸 교사다. <감성지능IQ> · <감성의 리더십>의 저자인 남편 다니엘 골먼과 함께 10년 동안 심리치료 워크샵을 이끌어왔다. 그리고 티베트 · 네팔 · 미얀마의 불교수행자들로부터 20년 넘게 수학한 다음 다양한 사례를 바탕으로 한 인지과학 · 불교심리학 · 깨어있는 마음의 수련 · 홈리스문제 · 티베트독립운동 · 노인과 장애자 상담 등 여러 인도주의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아울러 뉴욕의 인지심리치료센터에서 자기 학대적인 감정패턴의 변화를 위한, 인지 도식 치료를 연구 중에 있다. 그녀는 마음 · 명상법 · 그리고 최첨단인지심리학을 결합한 <감정의 연금술>을 전파하고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물을 반 컵 놓고 이렇게 말한다. “물이 반 컵 밖에 남지 않았네.” 이런 사람들은 부정적인 시각을 스스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물이 반 컵씩이나 남았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 말과 동시에 긍정의 시각이 만들어지면서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나 역시도 오래전에 겪은 일이지만, 어느 날 화장실에서 변을 보며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앞을 바라보니 뿌옇게 쌍인 먼지들이 천정 밑까지 쌓여 있는 것이 보이는 동시에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도대체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다고 저리도 많은 기도제목을 주신 것입니까?” 그런 생각에 휘둘러있던 나는 그 때 매우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꾸기로 작정하였다. 아니다. 내가 왜 지금 원망을 하고 있지? 원망대신에 감사를 해보자.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을 바꾸지? 생각을 바꾸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원망을 감사로 바꾸면 된다. 그렇다면? 그때였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하. 하나님께서 나에게 저토록 많은 기도제목을 주신 것은 나를 그만치 사랑하고 계셔서 일거다. 나를 연단해서 하나님의 귀한 일꾼을 만드시려고.” 그렇게 생각을 바꾸자 내 입에서는 저절로 감사의 말이 흘러나왔다. “하나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무지렁이 같이 못 생기고 못난 저를 저 높이만치 사랑해 주시니까요.”그런 감사의 말을 하고 나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으로부터 기쁨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형성되면 그런 것들이 모두 그 사람의 개성이 된다.
부정적인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아주 못마땅한 인간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생각 속에는 스스로 그 어느 것 하나도 잘해 낸 적이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혀있다. 이렇게 된 것은 어려서 잘못 형성된 확신이 지각이라는 보는 눈까지 왜곡되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잘하고 있는 실재의 증거들까지 모두 무시하면서 인생의 가장 값지고 즐거운 시간들마저 누리지 못한 채 자신에게는 계속적으로 채찍질만 가해 댈 것이다. 그것은 마음렌즈의 초점이 흐려져 있어서 그렇다. 예를 들어 썬 그라스를 써보자. 붉은 색깔의 썬 그라스를 쓰면 세상이 모두 붉게 보이고 푸른색의 썬 그라스를 쓰면 세상이 모두 푸르게 보일 것이다. 이처럼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의 보는 눈높이도 달라진다.
인간의 느낌에는 두 가지의 차원이 있다. 하나는 무슨 일이든 결코 잘해내지 못한다는 완벽주의의 느낌이고, 또 하나는 조건화된 반응에서 벗어나 있는 현실이다. 그리하여 연금술은 영적차원과 물질차원의 접촉이 잘 이루어질 때 이루어지는 기술이다. 어지러운 현상 속에 등장하게 되는 혼란스런 감정들을 논리 정연한 설명으로만 포장하려는 것이 아닌 끈질기게 탐구함으로써 직관적인 진실을 파악해 내는 기술이 바로 연금술이다.
영혼(靈魂)이라고도 불리는 마음의 형성은, 여러 가닥을 통해 한꺼번에 들어온 많은 정보들을 모두 흡수해야 되는 부담감이 있다. 이를테면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투 · 표정 · 몸짓 · 말의 속도 · 의미까지를 모두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의 말 뒤에 숨어있는 감정까지도 찾아내어 자동적으로 마음의 한 구석에 저장시킨다. 이럴 때 마음이 부주의적인 특정 행위에 대하여 몇 번이고 되풀이로 받아들이다보면 익숙해짐으로 인하여 수동적이거나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아주 무의식적이 되어서 자신이 어린 시절에 어찌하여 그런 습관을 배우게 되었는지 기억도 못하는 동시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어린 시절에 배운 습관들이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면서 내내 진실은 감추어 두고 있다. 동시에 감춰진 진실들이 드러나지 않게 대부분의 구획이 정해져서 보관되어 있다. 마치 요술 상자처럼 상자의 아주 작은 부분은 가끔씩 드러내지만, 그 전부는 절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오로지 나타낸 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을 동원시켜 버린다. 이렇게 되는 이유란, 우리의 지각장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시각은 오직 일정한 범위의 사물만 볼 수 있다. 세계 전체를 단번에 보기는 정말로 불가능하다. 듣는 것 역시도 그렇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서 기억에 저장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안다는 것은 단지 경험이라는 의식의 미립자들에 의할 뿐이기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만 포착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편도체가 컴퓨터의 기본성질처럼 가장 익숙해진 반응에 의지하면서 흘러나간다. 다시 말하면 사물들이 뿌옇게 보인 그 모습그대로 즉석에서 결정을 내려버린다. 그런데 대뇌신피질센터에서는 훨씬 명료한 영상을 전달해야 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은 지성의 이해를 맡고 있는 뇌의 좌상으로 가서 생각하는 센터에서 집중을 이룬다. 그리하여 신피질에서는 새로운 생각과 정보들을 가지고 기존에 형성되어있던 지식의 망에 연결을 시켜서 아주 빠르게 익혀나간다. 따라서 지식은 어떤 것을 읽기만 해도 충분하도록 학습은 이루어지지만, 해석과 의미를 낳는 감각 · 지각 · 기억 · 생각이라는 복잡한 기구가 없다면 자아의 전당이라 불리는 무의식은 아마도 무너져 내려버릴 것이다. 따라서 정서의 습관을 바꾸는 일은, 뇌의 안쪽 깊숙한 곳 좀 더 오래된 대뇌변연계의 센터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감정습관의 목록으로 불리는 무의식을 갖게 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아주 오래 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것의 가혹한 기준들인 박탈감 같은 것들을 수없이 거치면서 몸에 밴 것들이라서 이런 감정의 습관들에서 벗어나려면 좀 더 건강한 대응이 숙달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불교는 우리 자신의 습관적인 생각과 감정을 만들어내는 이 가상의 세계인 의식에서 벗어나는 범속한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근본적인 길로 세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긴장을 풀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차려야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역경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자신의 선택여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나쁘게 길들여진 인생의 덫들은 반복된 많은 사건들의 습관이 덫으로 정착된 경우인데, 이런 덫들은 자체의 현실에 근거해서 지금 보이는 대로만 세상을 받아들이게 됨에서 생긴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전망에 새로운 고통의 좌표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인생의 덫에 걸린 까닭은 삶의 기본적인 욕구를 잘못 받아들이는 동시에 충족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난 현상이다. 따라서 인생의 덫들에는 그 하나하나마다 독특한 느낌의 특징적인 괴로운 느낌들을 지니고 있는데, 덫에 걸렸던 그 순간의 감정과 비슷한 상황이 닥쳐오면 또 다시 절망적인 두려움에 빠져들거나 격분되어져서 우울해진다. 그런데 이렇게 부적절한 인생의 덫은 신경증적으로 나타나는데, 한편으로는 사랑받고 이해받으려는 기본적인 욕구와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꾀를 낸 것들이다. 신경증의 수준에서 자만에너지는 자아도취적인 자기애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아주 특별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의 찬탄 · 자신의 허식 · 경솔한 일에 탐닉되어 자기의 훈련은 전혀 하지 않거나 제한을 가하고 있다. 대부분 이런 사람들의 내면에는 수치와 실패의 느낌들이 숨어있기 때문에 자기 파괴적이므로 인식방법에 결함이 있다. 그리하여 분노의 에너지는 사물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에 대한 공격적인 고착 · 적의 · 과민한 방어태세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사물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유연함 · 정확한 평가 · 수정같이 투명한 지각의 깨달음이 요구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리고 폭력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불신의 덫에 걸린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신이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가정아래 상대를 공격하는데, 아내를 때리는 남편들의 일부에서는 아내로부터 자신이 버려질 것이라는 강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은 인간관계에서 상당히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는데, 이런 감정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서먹한 관계만 유지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인생의 덫들 때문에 세상을 한 가지로만 생각하고 느끼면서 이해하는 한가지의 습관으로만 반응한다. 그래놓고서 인생의 덫에 사로잡힌 채로 세상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택까지 급격하도록 제한해버린다. 몸에 맞춰 입은 양복처럼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에 대하여 편협한 방식으로만 풀어나가려 들기 때문에 이런 습관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처음에 형성된 어린 시절의 감정 패턴들을 되풀이하도록 만드는 감정에 정착되어 있어서 그런 사람들의 시야는 아주 좁아지고 유연한 반응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덫 자체에도 그 나름대로의 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의 안간힘에서 감정습관과 중독 사이에는 흥미로운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뇌의 회로에 아주 많은 양의 도파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균형상태라고 여기면서 평형상태를 유지하려고 뇌세포의 한부분에 도파민의 수용체숫자를 급격하게 줄여버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구자들에 따르면 중독은 뇌의 쾌락 회로망에 동일한 불균형을 일으키므로 덫을 바꾸려면 그 생명력을 고갈시켜야 된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행하는 행동의 반 이상은 무의식적인 습관에 따라 조건반사로 나타나는 것들이므로 나쁜 습관들을 고치려면 실제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깨달으면 된다. 왜냐하면 세포들은 병원균과 싸우다 죽으면 몸은 죽은 세포들을 모두 몸 밖으로 내보낸다. 이런 과정에서 격렬한 감정의 작업들을 거친 사람들은 감정의 패턴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죽어버린 감정의 세포들이 몸 밖으로 발산되려면 울음이 최고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보살핌을 받고자 하던 욕구에서 자신을 학대하던 부모에게 그런 것을 바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크나큰 고통과 슬픔이 찾아와서 욕구에 쌓인 나머지 격렬해져서 울음으로 방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생각이란 우리가 힘을 실려주지 않으면 아무런 힘을 내지 못한다. 그리하여 1세기경의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말하였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물자체가 아니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따라서 우울한 생각들이 실제로는 좌절과 동요를 일으키는 힘을 갖게 되면서부터 우울증이 생겨난다. 그저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만으로도 이전의 겪은 우울감에 대한 사건들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므로 우리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울증은 재발할 수 있음에서 악순환을 낳게 된다. 그러니까 우울을 느낀다는 생각 자체가 우울증의 유발자라는 논리이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면 소망의 되풀이를 읊조려야 한다. 왜냐하면 무의식에서 끌어올려 각인 시켜야 하겠기에 그렇다. 여기서 예를 하나 들겠다. 나는 기독교 신자로써 내 속에 나쁜 자아가 정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늘 이런 노래를 불렀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이렇게 다짐을 하자 나의 기준은 어느덧 주님께로 향해 있었다. 여기에서 주님이라면 세상의 이치를 말한다. 세상의 이치를 바로 알고 바로 살겠다는 각오가 서 있다면 그리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런 식으로 해서 나의 옛 자아(고집)를 버린 다음에는 세상의 진리말씀인 성경을 매일 읽음으로 긍정의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자 지금은 아주 밝은 마음이 되었다.
자신의 마음에서 감춰진 구획을 여는 열쇠는 자신뿐이다. 그러려면 자기 스스로(의식=현재의 눈에 보이는 나)가 자신(자아=무의식)과 친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친구는 서로 속임수가 없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 마음의 전부를 모두 다 알기 위하여 가장 큰 효과를 본 사람은 첫날부터 일기를 쓴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마음의 연금술에서 마음의 깊은 곳에 들어있는 슬픔 · 상처 · 강렬한 분노 · 좌절의 감정들을 솔직하게 토로하였다. 일기를 쓰면서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건들의 의미나 패턴이나 줄거리를 찾아냄으로써 자신을 반성하게 되자 자신의 덫으로부터 풀려났다고 한다. 자신의 인생에서 덫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데, 이는 자신의 감정반응을 스스로 알아차려야 된다. 그러려면 첫째,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어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려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때는 생각과 느낌이 판단은 하지 말고 오로지 그저 오고 가게만 해줘야 된다. 우리의 머리 전두엽의 앞부분에는 뇌의 관리센터가 있는데, 여기서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취할는지를 결정짓는다. 그런데 감정이 혼란해지면 이 속에 깊이 파묻혀있는 편도체 속의 메시지가 급격히 증가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충동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런데 좌측전두엽의 앞부분에는 편도체에서 흘러나오는 혼란을 억제하는 뉴런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역기를 많이 들면 근육이 늘어나듯, 이때 깨달음의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이들 회로는 강해지는 것 같다. 둘째, 이리해야 할까 저리해야 될까 갈등하는 마음이란, 우리의 마음이 어딘가를 향해 서둘러 달려가기 때문에 삶의 활동에서 분리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집중적이지 못해서 방심한 경우인데, 방심이란 지금 이 순간에 진실을 회피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셋째, 우리의 감정이란 습관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가 싫더라도 외면하면 안 된다. 여기서 정신집중은 우리가 호흡을 하는 일처럼 온전히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어 시행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내적능력을 키워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입견이나 판단에서 벗어나야 되는데, 선입견이나 판단은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 추측(상상)의 것들이다. 이런 정신은 버리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경험에만 반응해야 속임 수없이 마음은 밝아지게 되어있다. 끝.
출처 : 타라 베넷 골먼이 쓴 <감정의 연금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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