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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강동호 작성일 2015-08-15
제목 융 심리학 조회수 6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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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 심리학

http://ecoist.egloos.com/389462

출처
http://my.netian.com/~dudeo99/doc/uing.htm


융은 프로이트로부터 최초로 독립한 정신 분석학자로서 자신의 정신 분석학을

분석 심리학이라고 부르면서 프로이트와의 차별을 강조하였는데


이것 역시 프로이트의 영향 내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프로이트가 성적 욕구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여기고,


성적 욕구보다는 인간의 창조성과 본능이 개인을 넘어서 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고 이를 '집단 무의식'이라고 불렀다.

융은 인간의 생애를 가리켜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이야기'라고 했다.


또한 '인간 존재의 유일한 목적은 존재의 암흑 속에서 한 가닥의 등불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인간 존재의 목적이라기


보다는 인간 이성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로 볼 때 인간 존재는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인


간 존재의 유일한 이유는 차라리 존재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융


은 인간 존재의 목적을 인간 이성의 존재 목적과 구별하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의 인격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최소한 그것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


고 어떻게 작용하고 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는가를 밝혀야 한다.


우리는 인격을 정신에 포함시킬 수 있는데 우리가 혼, 영, 마음, 정신,


무의식, 이성, 감성,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체적인 하나로써 하나의 전체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은 주역의 음양 이론의 사상, 도가 사상, 태극 사상, 불교사상 등과

일맥 상통하는 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전체로서 나타나고 있는 인간의 정신은 의식, 개인 무의식, 집단

무의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은 사고, 감정, 감각, 직관등에 의해

성장해 가고 그 방향은 내향적일 수도 있고 외향적일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하나의 개인이 되어 가는것이다.

융의 개성화는 타인과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며, 자신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해 가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개입되는 결정적 의식이라는

것이다.



융이 말하는 자아는 의식의 기구인데 이는 의식 속에서 지각, 기억, 사고,

감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의식을 지키는 문지기다. 어제와 오늘의


자신이 같은 것으로 느끼는 것은 이 자아의 연속성과 동일성에 의한다.

인간은 셀 수 없는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그 경험들은 우리의 의식


속에 전부 수용될 수 없다. 억압된 것들, 괴로운 생각들, 도덕적인 갈등,


사회의 질서나 개인의 의식 속에 드러낼 수 없어 억압되거나 방치되는 것


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어딘가에 존


재하고 있다. 단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업'과도 개념이 비슷한 것인데,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으나 우리의 기억 속에 있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융의 개인 무의식이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융의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 그리고


그 둘을 넘어서 있는 것을 합쳐서 말하는 개념이지만, 그 업 개념의 일부


를 융은 개인 무의식이라고 불렀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자유 연상에 대비될 만한 융의 '언어 연상'을 통해서 발견되는

컴플렉스는 개인 무의식 속에 존재하며, 이것은 그 속에 감정, 사고, 기억들이

연합된 어떤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인격 속에 있는 하나의 작은 인격과도 같은

것으로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 컴플렉스가 강한 사람은 어머니에 대해서 집착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러나 컴플렉스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우리는 어떤 세계


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될 때 그 세계를 안내하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그런데 주로 우리에게 감추어진 길잡이란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의식이 깨어난다고 했던 것이다.

우리가 컴플렉스를 넘어설 때 우리는 그 컴플렉스를 통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길이 열리는 것을 흔히 본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은 정말 옳다.



그런데 융은 그 컴플렉스를 일으키는 근원적인 것이 개인의 경험을 넘어선

어떤 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개인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을 집단 무의식이라고 했다. 즉 인간의 정신은 개인의 과거뿐만

아니라 인류의 과거와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융의 집단 무의식은 의식화된 적이 없고 원시적 이미지로 되어 있다.


이것은 잠재적인 가능성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잠재적 이미지를 갖고

있고 이것이 현실 세계 속에서 여러 대상들과 동일시되어 의식적인 실재가

된다는 것이다.



융은 집단 무의식의 여러 내용을 원형 또는 태고 유형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내용이 없는 형식이며 무의식을 이루고 있는 구조적 틀이다.

단지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원시적이미지는 의식적 경험에

의해서만 그 이미지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태고 유형은 보편적이며, 컴플렉스의 핵을 이루고 있다. 태고 유형에

개인의 경험을 더하고 힘이 생기면 의식화된다. 우리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태고 유형은 다섯 가지인데 그것은 페르소나(가면,persona), 남성 속의

여성(anima), 여성 속의 남성(animus), 그림자(shadow), 자기(self)가 있다.



페르소나는 연극 배우가 쓰는 가면을 말한다. 이것은 보통 우리 외면의 모습이고

사회의 질서 속에 인정받을 수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사회에 적응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는 사회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페르소나에 지배되어 이중적 생활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융이 말하는 자아와 페르소나가 동일화되는 것을 팽창이라고 한다.

팽창이 이루어지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과신하면서 페르소나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의 인간적 본성은 상실되고 만다. 그래서 불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페르소나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경우에도 어느 순간에 인생의

공허와 허무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 성공이 페르소나에 기인하고 있기때문이다.



아니마는 남성의 여성적 요소를 말하고 아니무스는 여성의 남성적 요소를

말한다. 모든 남자는 자기 속에 여성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일정한

여성상이다. 이것은 무의식적이며, 태고 유형으로서 유전적이고 조상의

흔적이다. 이 이미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영되고 모든 이성간의 사랑과

증오의 근원이 된다.

서양 문화에서 적응에 대한 가치를 높게 생각하는 것은 페르소나의 우위를

유지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페르소나가 아니마, 아니무스를

질식시킨다.



융이 그림자라고 부른 태고 유형은 동성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이것은 동물적 본성을 많이 가지고 있으므로 최선과 최악의 근원이된다.

사회는 그림자의 적응을 요구하는데 이것은 페르소나의 발달에 의해 조절할

수 있다. 그 대신 인간은 자신의 창조성과 통찰력이 상실되는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단지 억압되어 있다. 인간에게 창조성이 살아날 때

그는 그림자의 영향을 받아 동물적이고 육감적인 정신이 충만해 질수 있다.

그래서 천재와 광기는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즉 그림자는 본능적이고,

생존을 위한 통찰과 반응의 근원이다.



인격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태고 유형이 '자기'다. 이는 집단


무의식에 중심에 있고 질서, 조직, 통일을 의미한다. 그 안에 일체성과


불변성이 있다. 갈등 속에서 조각나는 것 같은 자기의 기능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격이 성숙해 나아가는 목적지는 자기임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무의식 속에 깊이 있는 것을 의식화해서 사회적인 것과 본능적인 것의

조화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격의 구조 속에는 여러 가지 역학적 작용이 있다. 이 중 보상적 작용은

외부적 상실을 내부적 강화로 보상하는 것이다. 외부적 태도가 외향적


이라면 내부적 태도는 내향적인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대립적 작용을 대표하는 요소들 사이의 갈등은 생명의 본질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심리학적 이론들이 대립과 갈등의 원리를 떠날 수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대립이 없으면 긴장이 없고, 긴장이 없으면 에너지가

없으며, 에너지가 없으면 생명이 없다.

이런 대립의 통합은 초월적 기능에 의해 달성되는 창조성이다. 이것은


완성을 행해 간다는 균형 잡힌 통일적 인격의 형성을 말한다.



융은 우리 정신을 에너지가 닫혀 있는 단일 에너지계로서 자기 충족적


이라고 파악한다. 그런데 정신의 에너지 체계가 완전한 균형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외부의 자극에 의한 감각의 자극이 계속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융의 정신 에너지인 리비도는 프로이트의 성적 에너지 외에도 의식적으로

지향하는 것의 잠재적인 창조성을 포함한다. 정신 에너지는 심리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잠재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신체 에너지는 정신에너지와 서로

관련이 있고 상호 작용을 한다.

융의 정신 에너지를 설명할 때 '가치'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특정한

요소에 위임된 에너지 양을 나타내는 척도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역학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한다. 가치가 높을수록 쏟는 시간과 노력이 많고

선택하는 빈도가 높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꿈을 많이 꾸게 된다.

무의식적 가치는 컴플렉스의 응집력에 의해 나타날 수도 있다. 행동이나

꿈의 형식을 빌어 위장된 형태로 나타난다. 즉 어떤 일에 강한 부정을


하는 것은 역으로 강한 호기심과 관심을 나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언, 과잉 반응, 기억의 상실 등에서 우리는 컴플렉스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의식의 가치를 나타낸다. 또 지나친 정서적 반응은 그


배후에 컴플렉스가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직관이라는 능력이 있는


데 이것은 상대를 지배하고 있는 컴플렉스를 쉽게 알게 해준다.

정신 에너지에 대한 질서와 규칙으로 에너지 배분과 이동에 관한 원리


가 있다. 에너지 배분에 대한 것은 열역학 제1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


을 따른다. 한 요소에서 줄어든 에너지는 다른 요소에 그 등량이 나타남


으로써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다. 가치의 변화는 에너지


의 배분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가치는 꿈의 내용을 결정한다. 그리고 신경증의 증세도 정신


병의 증세도 무의식의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그 밖에 예술, 신화, 종교


등에서도 무의식을 볼 수 있다.

에너지 이동에서는 이동 전의 구조가 이동 후의 구조에 전이되는 현상


을 보인다. 예를 들어 권력에 대한 컴플렉스에서 성에 대한 콤플렉스로


이동하면 권력에 있던 가치는 성적인 것으로 이동한다. 만약 에너지가

페르소나로 이동하면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닌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어떤 사람 즉 타인이 되어간다.



에너지가 흐르는 방향은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의 원리를 따른다.


페르소나가 에너지를 적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페르소나로 흐르는 것이


다. 이는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자연의 법칙이다. 정신 세계에 외부로


부터 자극이 가해지면 균형을 깨뜨려 긴장과 갈등의 감정으로 대치된다.

다른 사람이나 동물, 사물과의 갈등은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투영이다. 아내와 싸우는 남편은 자신의 아니마와의 싸움이고, 죄악이나


배덕을 맹렬히 반대하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와의 싸움이다.

어떤 정신 구조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그는 다른 구조의 에너지를 빼앗는

독재자가 되어 외부에서 들어오는 에너지를 독점한다. 이 경우는 결국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정신 구조들을 통합하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엔트로피의 원리를 대표하고 있는 것은 '자기'다.

자기는 통합의 초월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정신적 에너지인 리비도가 전진하는 방향은 사회가 요구하는 방향과

일치해야 한다. 이것을 사회적 입장에서 전진이라고 하고 반대의 방향으로


에너지가 향하면 그것을 퇴행이라고 한다. 리비도의 전진이 중지되거나


퇴행하게 되면 존재의 안정성과 확실성은 무너지고 혼란이 오게 된다.

그러나 전진이라는 것이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라면 창조성의

상실일 수 있고, 퇴행이라는 것이 사회의 요구의 방향과 반대로 향하는 것


이라면 그것이 종족적 지혜와 창조성을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융에게 상징이라는 것은 에너지의 원천인 본능이 적응을 위한 에너지가


되기 위해서 본능과 유사한 것으로 에너지 수로를 이루는 것이다.

이 유사한 것을 상징이라고 한다. 결국 일이란 자연의 본능적 에너지가 문화적


이거나 상징적인 수로로 전류되는 것이다.

현대인은 의식보다 의지에 의해 살고 있다. 불안한 경우에는 의식이나


마법에 의존한다. 의지는 본래의 본능과 유사한 것을 만들어 내는 행위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마법에 대한 꿈 때문이다.



융이 말하고 있는 개성화는 단순한 구조에서 복잡한 구조로 분화되어간다.

이 과정을 통해서 페르소나, 아니마, 그림자는 복잡하게 표현된다.


그림자의 태고 유형은 무의식으로 되돌아가 원시적인 상태로 남는다.

이것이 억압을 벗어나면 가학적이 되거나 음란성 등으로 나타난다.

교육이라는 것의 원래 의미는 잠재해 있는 것을 끌어낸다는 뜻이다.

즉교육은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사회적 요구에 의해서 팽창된

페르소나는 인간의 창조성과 자발성 등을 결여시킨다. 그것은 하나의


가면이다.

진정한 교육은 인격의 개성화 후에 통합과 전체성을 향한다. 이것은 초월

기능이다. 초월 기능은 잠재해 있는 전체성을 개화시켜 결실을 맺게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동기를 통해서 자아가 생기기 시작한다. 학교에 들어가면 부모의

심리적 자궁의 닫힌 세계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다. 청년기와 성인기 초기는

정신적 출생의 시이? 중년기는 외적 적응에 사용한 가치가 정신적 가치로

옮겨간다. 개인 생활의 의미를 이해하고 재적 존재를 체험해나간다.

노년기에서는 개인은 무의식으로 가라앉고 그 속에서 소멸한다.


그리고 사후 세계에 대한 개념을 형성한다.



융의 이론에는 외향성과 내향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외향성은 정신적에너지가

외부의 표상을 향하는 것이고 객관적인 반면, 내향성은 정신 구조와 과정으로

정신적 에너지가 향하고 주관적인 특성을 지닌 개념이다.

외향자의 무의식적인 면은 내향적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또 인간의 심리학적 기능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인간의 사고는

여러 관념을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이고, 감정은 어떤

관념이 불쾌하냐 유쾌하냐를 느끼는 것이다. 이 사고와 감정은 이성적인

기능으로 판단을 필요로 한다.

감각은 감각 기관에 의한 지각을 말하고, 직관이란 직접적으로 주어진경험으로

예감과 같은 것이다. 이런 감각과 직관은 무이성적인 것이고 판단이 필요치

않다.

즉 감각은 무엇이 있다는 것을, 사고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감정은 그것이

유쾌한가 불쾌한가를, 직관은 그것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외향적 사고는 외부의 대상에 대해서 귀납적 사고를 하고 실제적이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미가 없어 보이고 냉혹하고 교만해 보인다. 내향적 사고는

정신의 내적인 것에 관심이 있고 연역적 사고를 주로 한다. 이런 사람들은

무감동하고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외향적 감정은 외부의 대상에 대한 미적 기준으로 인습적, 보수적인 경향이

있고, 내향적 감정은 내적인 원시 이미지와 관련이 깊고 창조적인경향이 있으나

때로는 기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외향적 감정에 속하는사람은 여성스럽고

과시적이고 기분파다. 내향적 감정이 두드러진 사람도여성적이기는 하나

감정을 감추고 침착하다. 신비적인 힘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우울해 보이기도

한다.

외향적 감각이란 외부의 객관적인 현실에 따른 개인의 결정을 말하고내향적

감각은 내적 주관적 현실에 의한 결정을 말한다. 외향적 감각이두드러지면

앞일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주색을 즐기고 탐미적이다. 내향적 감각이

두드러지면 예술가적이고 무의미하고 공허한 특성을 지니고 조용하다.

외향적 직관은 외부의 대상에 대한 가능성을 탐구하고 대상에서 대상으로 옮겨

다닌다. 이런 사람들은 엉뚱하고 불안정하다. 새로운 가능성을찾아 돌아다니고

끈기가 없다. 반면 내향적 직관은 마음 내부의 현상에가능성을 탐구하고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옮겨 다닌다. 이런 경우는 몽상가적이고 원시적 이미지에

묻혀 있다. 때로는 괴짜나 기인으로 보이기도한다.



이 모든 기능들은 어느 한 가지가 다른 것에 비해 두드러지게 나타날수는 있으나

전적으로 그것만이 있는 경우는 없다. 인간의 가능성 속에잠재적인 형태로

아니면 억압되어 있는 형태로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 수는 있으나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융의 무의식에서 태고 유형은 상징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이것의 의미는


상징을 분석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집단 무의식의 상징은


꿈, 신화, 예술 樗?통해서 나타난다. 이런 융은 상징의 분석에서 확충법을

적용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인류의 모든 분야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상징은 그것이 존재해야만 하는 필요성이 있는데 그것은 욕구나 충동에


대한 만족을 가져다주려는 시도이면서 동시에 본능적인 리비도가 문화적


인 가치를 띠게 해 준다. 즉 상징은 무엇인가를 단순하게 감추는 기호가


아니고, 미지의 세계에 속하는 무엇인가를 해명하려는 시도다. 다시 말해


태고 유형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결국 상징은 본능을 찾아가는 과거 지향적인 특성과 초월적 인격의 궁극성을

찾아가는 미래 지향적인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추진력은 본능에서

오고 견인력은 초월적 목표에서 온다. 따라서 상징은 인과론적이면서

목적론적이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향해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인간의

다양성을 보게 되며 그것에 압도되고 만다.

이렇듯 융의 정신 분석과 무의식에 대한 가설들은 그의 창조성과 독창성에

의해서 프로이트가 보지 못하고 있었던 영역을, 아니 프로이트에 의해서

상실되었던 영역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그도 역시 서양의 이성적논리에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역시 프로이트의 실수를다시 되풀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또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많은 이해의 영역을

보여 주었으며,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넘어선 그곳으로 우리를안내했다. 인간

이해에 대한 이런 그의 업적은 우리에게 엄청난 영향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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