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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일영 작성일 2018-10-26
제목 사기#개자추 조회수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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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개자추


작은 그릇은 큰 그릇을 품을 수 없지만 큰 그릇은 작은 그릇을 품습니다.
할 수 없이 작은 그릇 위에 큰 그릇을 얹어 놓으면 자칫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큰 소리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큰 그릇 속에 작은 그릇을 담아 두면 안정감이 있어 군말이 나지  않습니다.

옛날에 개자추가 그랬습니다.
개자추는 진문공 중이重耳가 공자였던 시절, 왕위다툼에서 밀려나 목숨의 위협까지 느끼며 19년 동안 이웃나라들을 떠돌 때 호모와 호언 형제, 조쇠, 선진, 위주, 전힐 등 문무文武의 인재들과 함께 중이를 보필한 덕분에 진晉문공은 제환공에 이어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중이의 아버지 헌공은 정치 환경이 불안한 중소 제후국에 불과했던 진을 중원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국으로 키웠지만 늘 후계 문제로 고민했는데 급기야 혈족조차도 믿지 못해 자식마저도 경계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옛기록들은 헌공의 애첩 여희에게 모든 음해를 뒤집어 씌우지만 자식조차 믿지 못하는 헌공의 의심과 권력에 대한 그의 집착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 데에 일조했을 것입니다.

중이의 동생 이오가 반란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진혜공이 되었을 때 중이는 신하들과 함께 진晋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를 방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혜공조차 이웃나라들을 협박하여 중이를 잡도록 하자 그는 밤에 산중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모두가 힘들었을 때 다른 신하들은 고사리로 연명했으나 귀공자인 중이는 고사리를 먹지 못하고 죽을 위기에까지 처합니다.
이에 개자추는 중이를 위하여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고깃국을 끓여 올려 중이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중이는 진목공秦穆公의 힘을 빌려 진혜공晉惠公을 물리치고 군주가 되었는데 그가 22대 군주 진문공晋文公입니다.
그는 조쇠를 승상에, 위주를 대장군에, 호언, 호모 형제에게도 대신의 자리에 앉힙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죽어갈 때 자신을 희생하며 고깃국을 끓여 준 개자추에게는 아무런 직책도 내리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개자추의 성정이 너무나 강직하여 이를 시기한 사람이 그의 주변에 많았던 탓이었을까요?
주군이었던 문공 입장에서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낼 정도로 충성심을 보인 개자추가 너무 부담스런 존재였을까요?

하긴 요즘도 주변에서, 출세하면 어려울 때 헌신하던 여인을 차버리고 새장가 드는 몰염치한 사내들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부담감이 들어 싫어서라는 답변이 돌아오는 걸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자추는 어머니의 물음에 답합니다.
 “문공은 아버지 헌공의 아홉 아들 중 가장 현명한 분이시니 임금에 오르는 일이 당연한 일이어늘 오히려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자신의 공로인 양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탐천지공貪天之功과 같은 짓입니다. 
하늘이 이미 정해놓은 공과를 탐하는 짓이니 남이 이룬 공을 다투어 도둑질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치스러운 행위입니다. 
차라리 짚신을 삼으며 가난하게 사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입니다.” 

개자추의 마음을 이해한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면산綿山이라 부르는 산으로 들어가 깊숙이 은둔하여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훌륭한 인품은 자식의 그릇을 크게 만듭니다.

뒤늦게 진문공이 후회했다고도 하고 한식의 유래를 말하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온몸으로 충성했던 개자추를 불에 태워 죽인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작은 그릇은 큰 그릇을 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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